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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_현재시대
경희궁_현재시대


판타스마고리_현재적 재구성

판타스마고리 즉 ‘마술환등’은 영사기가 나오기 이전 그림을 오려 빛을 이용해 비추어 환상적인 그림을 보고자 했던 17,18 세기에 성행하였다. 이른바 시뮬라시옹 세계로의 출입구가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고 허구, 환영에 매료된 당시의 현상에 기인하여 많은 비평가나 철학자들은 저마다 자신이 허위의식이라 생각되는 지점들에 <판타스마고리적>이 라는 형용사 표현을 즐겨 썼다.

특히 벤야민은 판타스마고리를 전승된 문화와 역사를 바라보는 즉, 과거의 환영에 사로 잡혀 현재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린다는 뜻의 단어로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예술작품의 비평과 해석에 있어 작품이 수용자의 주관적, 임의적 인 상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라 예술작품은 그때그때 현재의 관점에 따라 새로이 해석되고 새로이 씌 여져야 한다고 피력했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초시대적인 영원한 정신적 가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를 물을 것을 요구하는 것인데 그리하여 현재성(Aktualitat)은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여 과거와 미래 의 문을 동시에 열어주며, 지금을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 벤야민의 역사의식이다.

그렇다면 동시대 현대 미술의 현재성은 어떻게 추구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헤겔의 예술 종말론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종언은 무엇이 예술이고 예술이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가 모호한 시 대가 도래할 것임을 이미 예견한 것으로, 예술이 표현해야 할 내용이 다 소진되고 나면 예술에서 절대적 관심은 사라져버리고, 예술에는 더 이상 어떤 신선한 활동(frische Tatigkeit)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희망고문도 문제지만 아예 희망이 라는 단어조차 허용하지 않는 이 단호한 예언의 관점에서라면 예술은 한갓 지나가버린 과거의 영예일뿐이어야 한다.

그러나 헤겔은 예술의 과거성에 예술의 현재성을 대비시켜 예술의 사명은 한 민족의 정신에게 예술적으로 적합한 표현을 찾아주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에는 과거의 예술이나 예술가가 아니라 현재의 예술과 예술가가 요구되는 것이다. 소재를 다루는 방식은 정신의 현재성(Gegenwartigkeit)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 며, 과거의 어떤 소재라도 인간 가슴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다루어진다면,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예술가에게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이제 마술 환등기 판타스마고리로 비추어 보고자 하는 것은 이미 잘 차려진 화려하고 풍부한 과거의 환영이 아닌 오직 지금이다. 21세기가 도래하는 동안 우리는 수 없이 많은 글들과 교육을 통해 역사와 전통의 계승에 대해 반복적인 수혈을 받아왔다. 그러나 똑같은 복기로는 원작이 견뎌온 시공간의 아우라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까 과거 절대미로 존 재했던 예술작품의 완벽한 재현은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했을뿐더러, 그것은 역사와 예술의 현재성 관점에서 볼 때 예술 가의 천작과 소명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권창남, 우종일은 전통을 그대로 오려서 판타스마고리에 비추는 대신 전통 을 차용하고 패러디하고 해체하여 만든 현재적 재구성물을 지금 판타스마고리로 환등하려 한다.


현재 시대가 욕망하는 시뮬라크르

시뮬라크르는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드는, 원본이 없는 가상적 재현을 뜻한다.
미키마우스는 쥐를 형상화하여 만들어졌지만 현실의 쥐와 미키마우스 중 어느 것이 진짜인지에 관심 가지는 사람은 없다. 미키마우스는 그렇게 디즈니랜드와 애니메이션을 탈출하여 장난감 인형, 컵이나 풍선, 가방 등 새로운 시뮬라크르로 자가복제하며 현실세계를 지배해간다. 이미 우리가 현실세계라고 믿는 모든 세계가 가상적인 시뮬라크르의 세계, 즉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하이퍼리얼한 세계일 따름이다.

권창남의 조각은 대리석, 오석과 같은 묵직한 돌로 전통 가구의 조형을 직조 방식으로 재현한다. 반닫이, 이층장, 삼층장, 문갑 등 눈에 보이는 것은 영락없는 가구이지만 가구는 아니다. 경첩마저도 정교해서 실물처럼 보이지만 모두 돌이고 역시 경첩의 기능은 없다. 나무로 만들어진 전통 가구려니 하고 가까이 가서 만져보는 순간 재료가 단단하고 무거운 돌이라는 사실에 놀라는 이유는 우리의 시각이 가구라고 인지하고 난 뒤에 촉각을 비롯한 지각을 통해 알게 되는 사실에 대한 흔히 말하는 반전 매력 때문이다. 작품에 근접하는 순간 시각적 실루엣이 아닌 차고 단단한 대리석의 표피에 반응한다는 것은 일찍이 조각이 눈을 위한 예술이 아닌 몸을 위한 예술로 바뀌었음을 감각해낸 메를로퐁티를 소환하게 한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볼 때 드러난 것이 반닫이의 실루엣이었다면 가까이 밀착하여 본 것은 돌이라는 재료의 물성자체이다. 그것은 시각적 경험뿐 아니라 촉각은 물론 조각가의 강도 높은 노동력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몸의 체험을 겨냥해서 만든 조각이라는 반증이다. 이렇게 하여 반닫이의 이데아와 아우라는 상실되었고 이제 재현과 실재의 관계는 역전되며 나무 반닫이보다 더욱 실재같은 대리석 반닫이 즉, 극실재(하이퍼리얼리티)가 우리의 현재를 미혹시킨다. 세계와 구별되지 않는 모사물을 창조하려는 재현의 노력은 인간 욕망의 한 표현이며, 하이퍼리얼한 세계는 바로 이러한 욕망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현재시대가 욕망하는 시뮬라크르를 권창남은 이토록 온 몸으로 보여주며, 우리에게 온 몸으로 세계를 감각하라 한다.

우종일의 작업은 하이퍼리얼을 추구함에 있어 기존의 포토리얼리즘(하이퍼리얼리즘과 동의어)과 차이가 나는 것은 사진을 사진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포토리얼리즘은 회화를 사진 이미지처럼 보이게 하는데 그 묘미가 있었다. 실재보다 더 실재 같고 마치 사진인줄 착각하게 만드는 하이퍼리얼의 세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사진이 나온 이후에 생긴 쟝르이다. 사진으로 찍으면 될 것을 굳이 왜? 하는 질문이 생기는 건 당연한데 대상의 정밀한 복제에 대한 하이퍼리얼리즘의 열정은 그러니까 아무리 리얼한 묘사도 결국은 묘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이른바 가상현실, 즉 시뮬라시옹의 세계와 현실세계와의 조밀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종일의 사진을 사진처럼 보여주는 작업으로 돌아가면 이러하다. 최근의 사진은 그 해상도에 있어 상상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액정을 아무리 확대해봐도 도무지 망점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밀한 픽셀들이 만들어내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뻔뻔함에 놀라는 와중에도 카메라 렌즈가 생산해내는 해상도는 매일 진보중이다. 우종일의작품은 멀리서보면흑백사진에가까워보이지만가까이가서보면수많은망점들로가득차있고작품에한층 더 밀착하여 보면 수도 없는 보석 같은 작은 돌들의 형형색색을 볼 수 있다. 우종일의 작품 원본은 사진이다. 해상도 선명한 사진 원본을 해체하여 해상도를 낮추는 방법은 다름아닌 인상주의 점묘법의 차용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왕비와 궁녀들은 실재와 맞먹게 해상도 높게 재현되었다가 다시 돌점들로 해체되는데 이는 마치 시간의 현상액에 담궈졌다 나온 느낌을 준다. 현재의 사진을 옛날 사진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작업 과정은 차라리 회화에 가깝다. 포토샵 효과만 주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나 천차만별 크기와 모양과 색을 가진 낱알의 보석 돌들로 망점을 하나씩 채워 사진을 완성한다. 해체와 재현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종일의 재현-해체-재현의 포토리얼리즘은 현재시대가 원하는 새로운 감성의 시뮬라시옹으로 우리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우리는 지금 현재 시대를 살고 있고 권창남과 우종일의 조각과 회화는 시대 정신이 요구하는 시뮬라크르로 신선한 현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른바 추구하기, 도달하기, 뛰어넘기로 진행되는 헤겔의 예술 형식론으로 「경희궁_현재시대」 를 번역하면 이렇다. 내용이 형식을 찾아 헤매었던 시기와 내용과 형식이 완벽하게 부합되어 미의 이상을 실현하였던 과거를 지나 「경희궁_현재시대」에서는 이미 성취한 아름다움과 예술의 완성이 해체되는 뛰어넘기가 진행 중이다. 어떤 외적 형식에도 구속 받지 않고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주관적 내면성으로 과거를 향해 돌진하는 치열한 동시대미술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갤러리마리 아트디렉터 차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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